이성규작가
히든아티스트
한 해가 손 바꿈하는 한 겨울, 강추위 칼바람은 살갗을 에립니다. 누구나 인생 반환점이 도는 때가 오고, 비로소 바람 같은 시간의 속도에 칼바람보다 더 아파합니다. 27년 직장과 개인사업을 정리하고 전업작가 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왜 그림을 그리려고 할까, 그리고 무엇을 그려야 할까 라는 당연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답도 예측 가능하게 클리셰합니다. 그동안은 내 모습으로 살아온 게 아닌 것 같아서..... 쇼핑센터나 백화점에 가면 마네킹 앞에 서성이곤 합니다. 마네킹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아내는 마뜩찮게 타박합니다. 사람들은 마네킹은 표정 변화가 없는 레디 메이드 제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네킹도 옷을 바꿔 피팅될 때마다 분위기와 표정이 달라집니다. 마네킹은 극히 자본주의스럽습니다. 무언가를 판매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오롯이 쓰여집니다. 쓰임새가 명확합니다. 우리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네킹처럼 레디 메이드되고 쓰임새가 확실해지는 과정을 겪습니다. 난 기업생활과 사업 통들어 27년을 무엇엔가 쓸모 있게 살아왔습니다, 마네킹처럼. 그래서 마네킹은 내가 만들어 내는 그 당시 소중한 나의 페르소나입니다. 사회의 개인에게 대한 기대와 개인의 사회에 대한 욕구가 호응할 때 다수의 페르소나를 형성한다고 칼 융은 말합니다. 꼭 그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이 나이 쯤 되면 자연스레 느끼게 됩니다.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마네킹으로 내 이야기, 내 주위 이야기, 도시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신호등앞 횡단보도에 서 있는 것처럼 결정을 해야하는 실존의 삶을 살아가면서, 마네킹처럼 여러 개의 페르소나 일상을 보냅니다. 실존과 페르소나는 이질적이지만 난 그것을 주제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음 소재는 낙서입니다. 모더니즘 이전까지 인류는 나와 내 주위 환경에 대한 미메시스 범주안에서 그림으로 인류의 이야기, 그림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과연 알타미라의 구석기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풍요와 안녕에 대한 일념으로만 동굴벽화를 그렸을까? 그도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미적 의식이 있었으리라 봅니다. 그리는 행위에 대해 모더니즘 이전으로 회기해 볼까? 창문을 캔버스 삼아 창 밖에 펼쳐진 풍경을 따라 그리는 어린애들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누군가 만들어 준 창문위에 바깥 풍경을 미메스스하다가, 현실 vmdrud 위에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들을 낙서하듯 그리기 시작합니다. 고목위에 꽃들을 그리고, 홀로 앉아 있는 새를 위해 친구를 그려주고, 날지 않은 새를 위해 날고 있는 새들을 창문에 그리고 있는 어린애들을 모티브로 연작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