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리작가
평면
성신여자대학교 동양화과 학사과정에 3년째 재학 중이다. 동양화 종이가 다른 재료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집중하며 작업한다. 재료를 온전히 자신의 품 안에 가두어 존재하게 하는 종이의 물질성에 매력을 느끼며 평면과 입체 사이에 걸쳐진 반입체 형태의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동화책의 다음 장에 있을 이야기를 두 손을 꼬옥 모으고 기다리는 그 시간, 그 시간에 나의 그림은 뿌리내렸다. 물론 삶은 책 속의 이야기와 많이 다르다. 책 속 악당보다 더 무시무시한 악당이 우리 세상에는 존재하고, 더 큰 슬픔과 고통이 존재하기도 한다. 동화는 어쩌면 꿈과 희망을 배불리 먹여 우리를 살찌워 잡아먹으려는 무시무시한 악당들의 계획서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런 거짓말쟁이 동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내가 정이 많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도 교실 바닥에 떨어트린 지우개가 애타게 나를 기다릴 것을 생각하며 하루 종일 바닥을 보며 다녔고, 아무도 앉아주지 않는 까진 나무 의자가 불쌍해 옷이 상하더라도 신경 않고 앉았다. 얼마 전, 소중한 가족을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떠나보냈다. 갑자기 사라진 존재들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컸다. 그들과 함께 했을 이야기들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들을 위해 내 책의 이만큼을 비워두었는데,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사라졌다. 그 책 속의 이야기를 채운 것이 동화, 환상이다. 그들은 이야기가 되어 지금도 내 안에 아름답게 살아있다. 환상, 그것은 나에게 현실을 바라볼 시간과 용기를 주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세상을 좀 더 재밌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게 좋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환상을 그린다. 환상 속에 있음을 인지하며, 내가 살아가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내 책이 덮일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