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지작가
히든아티스트
나의 벽은 걷는다. 여행을 한다. 벽은 노래하고 춤추고 미소를 짓는다. 벽은 전쟁을 한다. 햇살을 부비고 꽃을 듣는다. 그리하여 벽은 판목(版木)이다. 스치는 것 모두 통째로 밀어서 베껴낸다. 그 벽에 귀를 대고, 하는 말을 듣고 싶다. 벽은 터지고 갈라지고 흘러내린다. 세월의 속살을 열어 보인다. 정갈하고 규칙적이고 튼실한 벽도, 세월 속에 잠시 그렇게 섰을 뿐이리라. 그래서 눈길이 멈춘다. 나는 통째로 밀어서 베껴두고 싶다. 어느 순간 스쳐가는 사람을, 향기를, 바람 한 점을 머리맡에 두고 읽어보고 싶다. 마스크를 쓴 벽, 바깥은 없는 캄캄한 내면의 벽만 그리는 날은 아마도 오지 않으리라. 이 갑갑한 시기가 얼른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주름 하나 꽃 그림자 하나를 잡고 그저 무심한 하루를 보내는 날이 이어지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