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윤작가
히든아티스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반짝인다
류동현 미술 비평
미술작품을 분석하는 데에는 작품이 드러내는 형식이나, 내용, 역사, 작가의 내적 상황, 사회적 상황 등 다양한 관점을 필요로 한다. 그 중에서 작가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는 방법도 작품을 분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고려된다. 이를테면 동생 테오와의 편지 등 문헌자료 등을 통해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의 작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그러하다. 최혜윤 작가의 작업을 분석하는 데 있어, 작업 자체의 분석뿐만 아니라, 작가의 삶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작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특히 작가의 경우 작가로서의 이력이 이른 나이에 시작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환경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작가가 아닌 인간 최혜윤의 삶은 스펙터클하다. 어렸을 때부터 화가의 꿈을 꾸었지만, 삶의 무게는 작가로 하여금 직장인의 삶으로 이끌었다. 공간연출디자인을 전공한 작가는 광고회사에 근무하면서 해외 파견 근무도 하고 대학교에 출강도 했으며 이후 대학교의 기술지주회사에 재직하면서 화가의 꿈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 꿈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서 계속 피어 올랐고, 결국 작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붓을 잡기로 한다. 1)
작가가 처음으로 주목한 작품은 <동궐도>였다.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는 경복궁 동쪽의 궁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鳥瞰)의 방식으로 그린 기록화다. 단색의 먹을 중심으로 작업하는 문인화와는 달리 선명한 색채를 통한 기록화의 화풍이 작가에게는 동시대의 디자인적인 요소로 다가왔다. 이렇듯, 전통 회화 중 채색화, 이른바 선명한 색채로 그린 진채화에 ‘꽂힌’ 작가는 나아가 <동궐도>를 모사(模寫)해 보고자 했다. 전통회화를 가르쳐주는 대학교의 취미반에 등록을 하고 도구나 기법을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는 방식은 작가에게 맞지 않았다. 사실 나이가 들고 무엇인가를 배울 때, 기초부터 배우는 방식보다는 하나의 대상을 마스터 하는 방식을 쓰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최혜윤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나아갔다. <동궐도> 모사를 통해 채색화의 방법을 배워나간 것이다. 본래 크기의 3분의 1 크기로 모사한 이 작품은 2017년 개최한 제1회 (사)한국민화진흥협회 전국민화공모대전 전통부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이후 작가는 본격적으로 작업 세계에 발을 디딘다. 전업작가로서의 삶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늦었지만 재능을 인정받은 작가는 곧바로 초상화 작업을 의뢰 받았다. 같은 해 제작한 <우보 초상>은 전통 채색화의 방식을 따르면서 세밀하게 제작한 역작이다. 특히 인물의 뒤에 위치한 지구의나 바닥의 카펫은 흡사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속에 묘사된 오브제처럼 세밀함을 드러낸다.
최혜윤의 작업은 전통 채색화의 기법을 따르지만, 동시대적인 감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는 작가가 이른바 오서독스(orthodox)한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미감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가 컸기 때문이다. 사진가인 데이비드 라샤펠의 2011년 작인 로부터 영향을 받은 ‘정물화 시리즈’는 화려한 꽃, 오브제와 더불어 짙은 파란 색의 배경, 흡사 안나 수이(Anna Sui)의 디자인을 차용한 듯한 액자와 어울려 동양적 정서와 서양적 감성이 작품 속에 혼재한다. 최혜윤의 회화는 전통적인 화조화와는 다르지만, 동양화 속에 내재한 생명이나 자연미, 복을 기원하는 의미와 16세기 서양에서 발달한 바니타스(vanitas) 그림이 지니는 ‘메멘토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즉 ‘죽음 앞의 겸손’이라는 상반된 의미가 혼재해 있는 기묘한 감성을 뿜어낸다. 과거부터 꽃을 화려함과 개성을 드러내는 소재로 좋아했던 작가는 이후 꽃들로만 이루어진 ‘부케 시리즈’로 나아갔다. ‘정물화 시리즈’에서 발전한 ‘부케 시리즈’는 파란 색 배경에서 나아가 다양한 배경 속에서 좀더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도드라진다. 이에 비해 다음 시리즈로 선보인 ‘담쟁이 시리즈’는 이전 시리즈의 개성과 화려함보다는 생명과 조화,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내포한다. 벽이라는 삶을 서로 도와가며 기어오르는 담쟁이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반추한다.
최혜윤 작가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화합’은 작가의 삶에서 일상과 작업이 만나고, 작가의 작업 속에 동양과 서양이 혼재하고, 삶의 여러 관계가 어우러진, 사전적 의미의 ‘화목하게 어울린다’는 ‘和合’일 수도, 꽃이라는 대상에 천착하는 ‘花合’일 수도, 이 모든 것이 화학적으로 섞여 새로운 방향을 드러내는 ‘化合’일 수도 있다. 결국 한글로 쓴 ‘화합’이라는 제목을 통해 인생과 작업, 삶과 죽음, 동양과 서양의 양가적 의미와 작업에 대한 특이점, 방향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작업을 시작한지 긴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한성대 대학원 회화과에 진학해 더욱 전문적인 작업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최혜윤의 작업은 더욱 앞으로 나아갈 여지가 보인다. 정물화 시리즈에서 나아갈 작업의 발전에는 이미 구축한 삶의 경륜, 자신만의 취향 등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혜윤 작업이 드러내는 작업의 주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혜윤 작업에서 재료는 채색화라는 작품의 형식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작업의 주제를 드러내는 주요 요소로도 이용이 된다. 비단이나 금박 등은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화려함과 깨끗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담쟁이 시리즈’에서 선보인 화면 바탕의 벽을 표현한 금박은 삶이 소중하다는 일종의 은유다. 전통 채색화에서 석채는 다양한 광물에서 색을 얻는다. 가루로 이루어진 석채로 비단이나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면 하나하나의 가루에서 빛을 발한다. 과거 직장인의 각박한 삶에서 자신의 이기적인 면을 발견한 작가는 어느 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느끼며 좁은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이야기한다. 2) 주위를 넓게 보면서 세상의 모든 것이 소중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석채도 마찬가지다.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석채 가루가 모여 하나의 형상이 되고, 내용을 드러낸다. 그리고 빛을 발한다. 즉, 작가는 이러한 형상과 내용을 만들어내는 석채를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주인공을 도와주는, 형상을 이루는 사소한 매체이지만, 이들이 모여 작품이 만들어진다. 이렇듯 세상을 이루고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세상에 중요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래서 빛이 난다고 말이다.
NPC라는 단어가 있다. ‘Non-Player Character’라는 단어의 줄임말인 이 단어는 게임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게임용어사전에 따르면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도우미 캐릭터”를 뜻한다. 주요 인물이 아니지만, 게임 속 세계가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아마 현실 세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세계의 뉴스를 장식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주목받지 못하는 이른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세상을 만들어가고, 유지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숨은 주인공들일 게다. 근래 공개한 영화 <프리 가이>는 이러한 NPC가 주인공이 되어 게임 세계를 뒤바꿔 버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듯 지금 이 시대가 이러한 ‘사소함’에 주목하고 있다. 최혜윤이 작업을 통해 동시대성을 획득하고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것 또한 바로 이 지점이다. 삶과 죽음, 동양과 서양, 꽃과 담쟁이,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모든 것들은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그들이 주인공이 될 때 세상의 모든 것이 반짝인다고 말이다.
주
1) 2021년 10월 22일 작가와의 인터뷰 중에서
2) 2021년 10월 22일 작가와의 인터뷰 중에서